우리는 무엇인가에 관한 간단(?)하지만 정말 놀라운 이야기
"이 글은 지하철이나 시끄러운 곳에서 읽지 마세요.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한 곳에서 읽으세요.”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어딘가 공허하거나, 직장에 다니면서도 ‘이게 내 길이 맞나’ 불안해 하는 순간이 온다.
혹은 자신의 삶이 시궁창 같고, 무기력한 상황에 처하여 있을 수도 있다.
본인의 삶과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고뇌하며, 온갖 걱정과 두려움에 고통 받는 당신을 위한,
그대에 대한 나의 사랑과 기쁨을 담아 쓰는 글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두 가지를 진심으로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만물에 대한 사랑
하지만 강요는 아니다. 그냥 이야기를 한 번 들어달라는 것이니까.
글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 배경자아가 무엇인지 배우고 그것을 느껴보는 체험(체험이 중요하다. 직접 해봐야 한다.)
- 데이비드 봄의 이야기
- 배경자아와 당신의 정체
간단하게 세 파트로 구성했다.
마음같아선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다 쏟아주고 싶지만
이보다 잡소리가 많아지면 지루하고 현학적이니까.
글에 대하여 추가적인 해석이나 반박이 있거나,
본인들이 궁금한 점이 있다면 나에게 나누는 것을 망설이지 마라.
언제든 기쁜 마음으로 듣겠다.
배경자아의 체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우리에게 '경험 자아'와 '기억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명상과 영성의 대가들은 여기에 더해 제3의 자아, 바로 '배경 자아'에 주목한다.”
각각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경험자아: “지금 어떻게 느끼는가?”
현재 이 순간을 살아가는 주체. 경험자아는 “지금 행복한가?”에 답한다. 하지만 이 자아는 기억력이 짧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곧바로 사라진다.
기억자아: “그것은 어떤 의미였는가?”
우리가 흔히 ‘나’라고 부르는 존재. 경험을 편집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스토리텔러.
배경자아: “누가 지켜보고 있는가?”
경험과 기억이 일어나는 ‘무대’. 명상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지점.
현대 뇌과학에서도 우리가 생각과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능력(메타인지)이 뇌의 구조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우리는 이 과학적 발견을 넘어, 더 깊은 내면의 진실을 마주하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을 하고 기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 걸음 뒤에 물러서서 그것을 본다는 것이다.
그것을 배경자아라고 한다.
마치 영화의 스크린처럼 경험과 기억이 상영되는 공간이다.
배경자아에서 기억자아와 경험자아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다.
스크린 안에서 불이나든, 폭탄이 터지든, 스크린 자체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
흔히 ‘고요’에 빗대어 배경자아를 설명한다.
금속의 종을 친다고 상상해보자. 댕~ 소리가 날 것이다.
크게 나던 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이윽고 소리가 사라지는 그 지점이 있다.
그 끝에서 고요는 드러난다.
youtube.com/watch?app=desktop&v=87TOIzw-mIo&t=2s&pp=2AECkAIB
소리가 상상이 안된다면 이 영상을 켜보자.
금속이 울리던 것이 사라지는 지점, 그 후에 드러난 고요에도 집중해보자.
"잠시 여기서 스크롤을 멈추자. 눈을 감고 방금 읽은 내용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10초만 느껴보자. 당신 안의 고요를 확인하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자.”
사실 고요는 드러난 것이 아니다.
원래 그곳에 있었을 뿐. 소리가 있든 없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무한한 무엇인가다.
우리의 배경자아도 같다. 우리 몸 속에 심어져 있는 '고요’다. 내면의 배경자아 역시 슬픔, 기쁨, 시끄러운 생각들이 지나가도 그 본질은 단 한 번도 흔들리거나 오염되지 않는 고요 그 자체이다.
당신이 슬픔을 느낄 때, 당신은 슬픔 그 자체가 아니다. 당신은 ‘슬픔이 상영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고요한 무대’다.
진정한 ‘나’는 바로 이 ‘배경자아’다.
배경자아는 모든 인간에게서 관찰된다.
배경자아를 알아차리면 알아차릴수록 아주 놀라운 인간의 능력이 발휘된다.
감정의 널뛰기가 줄어들고, 인간관계를 잘하고, 집중력이 올라가고, 한 과제를 오래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인간의 모든 활동의 지표가 올라간다.
이 이야기가 너무 허황되게 들릴 수 있다.
내가 어떻게 이 텅 빈 고요란 말인가 싶을 수 있다.
흥미롭게도 현대 물리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가 고립된 입자가 아님을 시사한다.
양자역학의 거장 데이비드 봄의 시선을 빌려, 당신이라는 존재의 과학적, 우주적 의미를 들여다보자.
데이비드 봄
데이비드 봄의 내재적 질서와 내향적 펼쳐짐(Enfoldment)
데이비드 봄은 **외향적 펼쳐짐(Unfoldment)**과 **내향적 펼쳐짐(Enfoldment)**를 통해 우리 세상을 설명한다. ****
둘은 각각 다음과 같은 관점이다.
외향적 펼쳐짐(Unfoldment): 드러난 질서(Explicate Order), 고전물리학으로 대표되는, 부분이 먼저고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관점
ex) 세상은 원자→분자→물체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부터 시작된다는 관점
내향적 펼쳐짐(Enfoldment): 내재적 질서(Implicate Order),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전체가 먼저라는 관점
ex) 우주 전체가 있고 그 안에서 우주 전체의 움직임에 따라 물체, 정보 등이 떠올랐다 사라진다는 관점
현재 우리의 세계를 설명하기에 훨씬 사실에 가깝고 적합한 모델은 내향적 펼쳐짐의 관점이다.
아래 그 사례들을 가져다 놓았다.
https://www.ibs.re.kr/cop/bbs/BBSMSTR_000000000901/selectBoardArticle.do?nttId=18043 이중슬릿실험
https://news.samsungdisplay.com/18963 양자도약
https://www.youtube.com/watch?v=yl6fvJKbpvM 잉크와 글리세린
기존의 외향적 펼쳐짐의 세계관만으로는 입자와 파동의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슬릿이나 원자 주위를 돌던 전자가 순간이동 하는 양자도약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내재적 질서로서 이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사유의 단위가 ‘입자’나 ‘실체’가 아니라 ‘사건’이나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인식하는 사물, 대상, 형태, 입자 등은 전체적으로 움직임의 결과에 따라 떠오르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봄은 안으로 향하는 내향적 펼쳐짐(enfoldment)과 바깥으로 향하는 외향적 펼쳐짐(unfoldment)의 총합을 ‘전체적 움직임(holomovement)’으로 개념화한다.
내향적으로 펼쳐져 들어왔다가 다시 외향적으로 펼쳐져 나가는 움직임의 총합이 곧 우주의 ‘근본적인 실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것은 홀로그램 필름의 원리와 비슷하다.
홀로그램 필름은 아무리 작게 조각내도 그 조각 하나한에 전체의 이미지가 그대로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비드 봄은 우주를 거대한 홀로그램과 같다고 보았다.
비국소적 연결: ‘내향적 펼쳐짐(Enfoldment)’이 일어날 때 단순히 정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정보망 속으로 밀도 높게 압축되어 들어간다.
상호 침투: 이렇게 압축된 정보는 우주의 모든 좌표에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다시 ‘외향적 펼쳐짐(Unfoldment)’이 일어날 때, 하나의 부분은 단순한 파편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에너지를 머금은 채 나타나게 된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 속으로 접혀 들어간다. 전체로서의 우주가 하나의 부분으로 접혀 들어가며, 다시 하나의 부분이 전체로서의 우주로 접혀들어가면서 펼쳐진다.”
이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이나 입자들은 이 거대한 상호작용의 물결 위로 잠시 떠오른 부차적인 현상일 뿐이다.
더욱 더 멋진 결론을 내기 위해 몇 가지 개념들을 더 이야기해보자.
소마-시그니피컨스(Soma-Significance)
소마는 그리스어로 몸을 뜻한다. 물질적 물리적 전체를 의미한다.
시그니피컨스는 의미 혹은 중요성을 뜻한다. 생각, 정보, 가치, 정신적, 영성적인 것을 의미한다.
핵심 원리는 간단하다.
의미가 물질이 되고, 물질이 의미가 된다.
언어와 몸의 대화 (말 한마디의 물리력)
- 의미 → 물질 (Significance → Soma): 누군가 당신에게 "사랑해" 혹은 "너 정말 한심하다"라고 말한다. 이 소리는 단순한 공기의 진동(물질)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당신의 뇌에 도달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아드레날린이나 옥시토신 같은 화학 물질이 분비되고 심장 박동(물질)이 변한다.
- 물질 → 의미 (Soma → Significance):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나는 신체 상태(물질)가 발생하면, 우리 뇌는 이 현상을 바탕으로 "나는 지금 긴장하고 있다" 혹은 "저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라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DNA: 생명의 설계도와 육체
- 물질 → 의미 (Soma → Significance): DNA는 아데닌(A), 구아닌(G) 같은 화학 물질들의 나열이다. 이 화학적 배열(물질)은 생명체를 어떻게 만들고 유지할지에 대한 거대한 정보와 의미를 담고 있다.
- 의미 → 물질 (Significance → Soma): 유전 정보라는 '의미'는 세포 속에서 단백질을 합성하고 뼈와 근육을 만드는 물질적 과정을 실제로 지시하고 실행한다. 설계도라는 의미가 없으면 벽돌(아미노산)은 집(몸)이 될 수 없다.
파도에서 에너지/방향성과 파도의 모양을 분리할 수 없듯이, 모양이 곧 에너지의 표현이고, 에너지가 없으면 모양도 사라진다.
“우리 눈에는 물질과 의미(정보)가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홀로무브먼트(Holomovement)라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물질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의미(정보)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우리 몸 안에서 보이지 않는 ‘마음’이 보이는 ‘물질’로 변하듯, 데이비드 봄은 이 우주 전체도 거대한 의미(정보)의 흐름이 물질화된 결과물일 수 있다고 보았다.
시공간
데이비드 봄의 관점에서 시공간은 우주의 근본 원리가 아니라 현적 질서에서만 나타나는 하위 개념이다.
- 홀로그램의 비유: 홀로그램 필름 자체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다. 모든 정보가 중첩되어 있을 뿐. 여기에 빛을 비추어 화면에 띄웠을 때 비로소 사물 사이의 거리와 순서가 생겨난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에너지가 아주 낮은 진동수로 응축되어 단단하게 느껴지는 상태일 뿐이다.
- 진동하는 존재: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들을 확대해 보면 사실상 텅 비어 있으며, 그 안은 끊임 없이 진동하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 시공간의 소멸: 에너지 그 자체의 상태(내재적 질서)에는 ‘여기’와 ‘저기’, ‘과거’와 ‘미래’의 구분이 없다. 모든 에너지는 하나의 거대한 장(Field) 안에서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건가?
어려운 이야기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아래와 같다.
물질은 응축된 에너지이고, 인간은 그 에너지가 형상화된 존재다. 우리의 의식과 몸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흐름(소마-시그니피컨스)이며, 그 뿌리는 시공간이 생겨나기 이전의 ‘내재적 질서’에 맞닿아 있다. 따라서 그 근원인 배경자아는 시공간이라는 결과물에 갇히지 않고 이를 초월한다.
영원한 현재에 머무는 배경자아
배경자아는 가동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시공간을 넘는 자각: 의식이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내가 100년 전의 전생에 있든, 지금 이 방에 있든, 혹은 먼 미래의 어느 별에 있든, 그 모든 것을 관조하는 나(배경자아)는 단 한 번도 변하거나 이동한 적이 없음을 뜻한다.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우주 전역에 있는 것이다.
- 윤회의 실체: 윤회는 ‘영혼이 시간을 따라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 질서 속에 있는 ‘나’라는 정보가 서로 다른 시공간의 좌표에 동시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배경자아는 왜?
우선 배경자아의 정체부터 밝혀보자.
- 전제 1 (영화와 스크린): 영화관에서 영화가 상영될 때, 영화 속의 화재 장면(현상)은 스크린(바탕)을 태울 수 없다. 홍수 장면이 나와도 스크린은 젖지 않는다. 영화 속 주인공이 태어나고 죽더라도, 스크린은 태어나거나 죽지 않는다.
- 전제 2 (경험과 알아차림): 우리의 인생(영화)에서 수많은 생각, 감정, 감각, 사건(현상)들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러나 이 모든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나타날 수 있는 ‘바탕’이 있어야 한다. 그 바탕이 바로 ‘알아차림(배경자아)이다.
- 전제 3 (불변성과 초월성): 우리는 5살 때의 나, 20살 때의 나, 현재의 나를 모두 ‘나’라고 느낀다. 신체와 생각, 기억은 모두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를 지켜본 ‘알아차림’ 그 자체는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 결론 (신성의 속성): 변하지 않는 것(Immutability), 모든 현상의 바탕이 되는 것(Ground of Being), 현상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 것(Purity). 이 세 가지는 모든 고등 종교가 정의하는 신의 핵심 속성이다. 우리의 배경자아가 가진 이 불변과 순수의 속성은, 우리가 그토록 찾아헤매던 신성(Divinity)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배경자아를 만나는 것은 곧 내 안의 신을 만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성경적 증거: 모세가 신의 이름을 물었을 때, 신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라고 답했다(출애굽기 3:14). 이는 신의 본질이 어떤 인격체나 형상이 아니라, ‘순수한 존재’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신성과의 연결: 기독교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와 불교의 “일체중생 실유불성(모든 존재에게 불성이 있다)”은 동일한 진리를 가리킨다.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이미 완전한 형태의 행복과 평온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의 중심부에 신적 영역이 내재해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가 배경자아를 만나는 순간 경험하는 절대적 안온함이야말로 그 자리가 신의 자리임을 증명하는 경험적 증거다.
배경자아와의 일치: 우리가 명상을 통해 모든 생각과 기억, 감각을 제거해 나갈 때(Neti Neti), 마지막까지 제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실은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 즉 ‘성성한 깨어있음’이다. 이 순수한 존재감이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신의 이름 ‘I AM’과 정확히 일치한다.
루퍼트 스파이라의 인용: 루퍼트 스파이라는 이 지점을 명확히 한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깊은 본질은 하나님의 이름과 같다.” 즉, 배경자아를 깨닫는 것은 내가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신의 일부였음(혹은 신 그 자체였음)을 기억해내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에너지의 장(배경자아)은 왜 이 세상을 만들었는가?
‘전체(배경자아)’의 입장에서 딱 하나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동등한 존재와 함께하는 경험이다.
- 망각의 숨바꼭질(Lila): 신은 스스로의 기억을 지우고 수억 개의 조각으로 자신을 나누었다. 자신이 신임을 잊고 인간이라는 배역에 몰입함으로써, 다시 서로를 발견하고 사랑하는 '우주적 숨바꼭질'을 시작한 것이다.
- 제약이 주는 드라마: 모든 결과를 알고 있는 게임은 재미가 없다. 배경자아는 스스로 시공간이라는 제약을 걸고 이 하드코어 서버(지구)에 접속했다. 이곳에서의 고통과 기쁨, 만남과 이별은 전체가 자신을 새롭게 체험하기 위한 정교한 시나리오다.
최종적인 고백: 당신은 누구인가?
이제 가면을 벗고 우리의 정체를 밝힐 시간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믿어왔던 ‘한계 많은 인간’이 아니다.
당신은 전체가 투영된 존재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신의 파편’이나 ‘우주의 일부’라고 말한다. 하지만 데이비드 봄의 홀로그램 원리는 더 파격적인 진실을 이야기한다. 홀로그램 조각 하나에 전체의 이미지가 통째로 들어있듯, 당신이라는 작은 좌표 안에 우주 전체(배경자아)가 고스란히 접혀(Enfold) 들어와 있다. 오히려 신이나 우주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당신은 우주의 눈이다
우주는 당신이라는 고유한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보고, 당신이라는 몸을 통해 물질세계를 만진다. 당신이 무언가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때, 그것은 사실 우주가 당신을 통해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있는 순간이다.
경험하고 즐겨라
신은 큰 그림을 그려놓았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주의 뜻이다.
결론: 죽음의 해방과 무한한 사랑
위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를 괴롭히던 두 가지 거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 죽음은 축제: 죽음은 삭제나 소멸이 아니다. 외향적으로 펼쳐졌던(Unfold) 당신의 정보가 다시 본래의 고요인 내재적 질서로 내향적으로 접혀 들어가는(Enfold) 과정일 뿐이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의 불이 켜지면 배우가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오듯, 당신은 더 거대한 전체로 확장된다. 죽음에 이르러 눈 깜빡한 순간, 당신은 배경자아와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외향적으로 펼쳐져 이 땅에 나타날 수 있다.
- 사랑은 본능: 타인은 분리된 남이 아니다. 시공간이라는 지도 위에 다른 좌표로 펼쳐진 ‘또 다른 당신’이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거울 속에 비친 나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존재론적 본능이다.
이 글은 논리적으로 완벽하지 않다.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뇌가 만들어낸 착각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의 평온함이, 그 압도적인 사랑의 감각이 가짜라면, 왜 우리는 그토록 이 느낌을 그리워하는가?
이것은 뇌의 작용을 넘어선, 우리에게 새겨진 본능적인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지금 잠시 ‘인간’이라는 배역에 깊이 몰입해 있을 뿐이다. 눈을 감고 당신 안의 배경자아(고요)를 느껴보자. 그곳은 단 한 번도 상처 입은 적이 없으며, 언제나 완벽한 평온 속에 있다.
“당신은 당신, 우주, 신, 타인 그 자체이다. 서로 사랑하자.”